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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크리스마스에도 기적은 있다

지난주 암과 사투중인 한인 일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도했다. <본지 12월21일 A-1면> 인터넷 모금 사이트에 사연을 올린 딸(줄리)을 비롯한 부모님 등 가족 모두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이야기였다. 줄리씨는 본인의 건강도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2살 된 쌍둥이까지 홀로 키우며 부모님을 간병하고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결국, 버티다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가족이 처한 상황을 외부에 알린 것이다. 처음 줄리씨 가족의 사연을 접했을 때 글을 써야 하는 기자의 본분을 차치하고, 인생에는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침울한 마음이 앞섰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기사 작성 전 잠시 눈을 감고 이 질문을 자문해보는데 어떠한 답도 스스로에게 내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난해하고 자신할 수 없는 게 '삶'이다. 기사를 접한 수많은 독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테다. 깊이 고민해 봐도 섣불리 답을 낼 수 없는 인생의 난해함 앞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최씨 가족의 상황을 모른 척 외면하지 않겠다는 작은 관심과 공감이었다. 기사가 보도된 후 편집국에는 각자 상황에 맞게 최씨 가족을 돕고 싶다는 문의가 이어졌다. 인터넷 모금 사이트에는 5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으다 보니 현재(24일) 5만2000달러 이상의 기부금이 모였다. 목표 금액보다 2000달러 이상 더 걷혔다. 24일 오후 4시 현재까지도 기부는 계속되고 있다. 꼭 '돈'이 아니라 해도 짧은 응원의 메시지부터 암치료에 필요한 식이요법을 알려주는 독자까지 하나둘씩 마음을 보탰다. 줄리씨는 기사 보도 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각박한 세상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직 이 사회가 따뜻하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에게 전달된 500명의 온정은 그녀 가족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됐을 터다. 우리네 인생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다. 이해하기 어렵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그 길을 그럼에도 걸어갈 수 있는, 그리고 걸어가야 할 이유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삶은 나만 홀로 걷는 길이 아니라는 거다. 줄리씨 가족에게 보태진 마음들을 면면히 살펴보니 그건 분명한 사실이 맞다. 한인 기부자가 올린 글은 모두의 염원이다. "기적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리씨 가족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8-12-24

[취재 그 후] 세습, 왜 당당하지 못한가?

지난주 종교면에 한국의 초대형 교회인 명성교회의 '부자(父子) 세습' 논란을 보도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욕망'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등록 교인수만 무려 10만 명, 연간 재정이 350억 원에 달하는 교회라 그런지 논란은 크다. 미주 한인 교계에서도 명성교회 세습은 논란이다. 김삼환 목사와 아들 김하나 목사가 여러모로 한인교계와 연이 깊어서다. 기사 작성을 위해 반대 입장뿐 아니라 세습을 지지하는 주장도 듣고자 했다. 현재 한인교계에서 활동 중인 명성교회 출신의 목회자들을 찾았다. 지난 5월 버지니아 페어팩스 지역 S교회로 부임한 J목사는 명성교회 부목사 출신이다. 그는 부임시 김삼환 목사로부터 창의적 목회를 배웠다고 공언했던 인물이다. 세습에 대한 견해를 조심스레 물었다. J목사는 대뜸 불쾌하다는 듯 "나눌 이야기가 없으니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올해 초 LA지역 대형교회인 Y교회로 부임한 P목사 역시 명성교회 부목사 출신이다. 심지어 그는 아들 김하나 목사와도 유학 생활을 같이했기 때문에 부자 목사와 모두 가깝다. 그러나 P목사는 "(답변을 하면) 목회적으로나 우리 교회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며 회피했다. 물론 민감한 이슈인 것은 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답변은 상당히 비겁한 처신이다. 그 누구보다 명성교회와 부자 목사에 대한 상황을 이해하면서 측근으로서 소신있게 견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분명 둘 중 하나다. 세습에 대한 암묵적 지지 아니면 반대 여론이 두려운 나머지 세습 비호 발언이 본인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일 테다. 도대체 그들은 왜 당당하지 못할까. 그러한 반응은 오히려 이번 세습이 얼마나 떳떳한 결정이 아니었는가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종교는 신(神)으로부터 얻게 되는 강력한 신념이 바탕 된다. 그게 없으면 형이상학적인 종교를 현실에서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만약 명성교회 세습이 그러한 소신에서 비롯된 결정이라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으니 떳떳하고 자신있게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행여 외부의 눈총과 여론이 신경쓰였다면 애초에 세습 자체를 추진하면 안 됐다. 김 목사 부자의 측근들을 보니 세습은 잘못된 결정임이 분명해 보인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7-11-27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2016년 마지막 주 종교면을 만들며…

종종 '취재 그 후' 칼럼을 써왔습니다. 취재 뒷이야기나 소회 등을 독자와 솔직히 나눠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독자들과 얼마나 친밀한 소통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기자는 때론 일방적인 전달자 입장이 되곤 합니다. 물론 독자로부터 피드백을 듣긴 하지만 기사와 관련된 사항만 논할 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생략되기 일쑤입니다. 2016년의 끝자락입니다. 올해 마지막 주 종교면은 어떻게 만들까 고민을 하다가 속마음을 격의없이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글을 씁니다. 기사를 접한 독자들이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묻습니다. "종교가 무엇이냐"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욕을 많이 먹지 않느냐" "기자 생활은 재미있느냐" 등의 질문입니다. 그때마다 기사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라면 개인 신상에 대한 답변은 피했는데, 그게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하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관련,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해서는 늘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기사를 작성할 때 그만큼 고민도 많고 안타까운 마음도 있습니다. 반면, 미담이나 좋은 소식을 보도할 때면 그 누구보다 뿌듯하고 보람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냉정해지려고 합니다. 자칫하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죠. 한 예로 크리스천 경찰이 있습니다. 그 경관이 음주운전자를 단속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교회 교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범법행위를 몰래 눈 감아준다면 그 경관은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양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특정 위치에 있는 신앙인이 기독교에만 특혜를 준다면 그것 역시 정당한 일은 일은 아닐 겁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교계의 양지와 함께 음지도 조명하고 타종교 소식도 골고루 보도하는 겁니다. 그게 신앙적으로 합당한 직업 윤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욕설을 듣기도 하고 오해와 각종 구설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기자로서의 소신과 환경 사이에서 내면의 갈등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자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 할 말'을 하는 역할이 주어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기자 생활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펜을 들고 있는 동안은 부끄러운 글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언론인으로서 독자에게 가장 신뢰를 얻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해 저희 가정에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참 특별했던 한 해였습니다. 퇴근 후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엽게 웃는 아기를 볼 때면 하루 내내 힘들었던 일과 스트레스는 연기처럼 사라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막중해졌지요. 책임이라는 것은 인생의 성숙 역시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 성숙함이 앞으로 쓰게 될 수많은 글에도 녹아들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는 독자들과 여러 방면에서 좀 더 가까워지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페이스북(www.facebook.com/bruinsryan)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다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그 설레는 기대를 안고 저도 내년을 준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2016-12-26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잘 보이지 않는 교계의 애환

노숙인을 돌봐왔던 최명균 목사(베레카홈리스미니스트리)가 최근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본지 10월5일자 A-1면> 평소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최 목사는 경제적 형편상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노숙자 사역만큼은 계속 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게 먼저일까, 생계와 건강부터 챙겼어야 하는 게 먼저일까. 저마다 답은 달라도 분명한 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최 목사의 헌신만큼은 분명 울림이 크다. 최 목사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겨울이다. 그는 노숙자들의 생활상이 담긴 사진 몇 장을 들고 무작정 본지를 찾아왔다. 그는 "난 유명인도 아니고, 이름 있는 단체를 운영하지도 않는다. 교계에서 소위 '빽(배경)'있는 목사도 아니다. 노숙자를 도와야 하는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어 찾아왔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침낭을 기부받아 노숙자에 전달하는 사역을 해왔다. 지난 연말에는 샌타애나 지역 다리 밑에 사는 노숙자들의 삶을 취재할 수 있도록 현장을 직접 안내해주기도 했다. 기자로 활동하다 보면 수많은 종교인을 접한다. 내로라하는 유명인도 만나지만 인지도 없는 '동네 목사'들을 만나 현실의 이야기도 듣는다. 물론 지면에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담는 건 한계가 있다. 대중은 유명세나 명성이 가져다주는 아우라에 더 쉽게 귀를 기울이고, 언론은 그것을 조명해야 시선을 끌 수 있다. 그럴수록 독자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실제 현장의 소리를 지면에 담고자 했다. 오해하면 안 된다. 교회 규모나 유명세가 양지와 음지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건 말끔한 양복 대신 허름한 옷, 정기적인 사례비 대신 불규칙한 수입, 교회 돈으로 선교나 해외 집회를 다니는 대신 휴가도 없이 가족 여행 한번 못 가는 목회자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수백만 달러짜리 화려한 교회 건물은 멀리서도 눈에 띄지만, 생계형 목사 또는 길바닥 사역의 애환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는 자본이 힘을 결정한다. 슬프지만 기독교 역시 그 원리가 어느 정도 작용한다.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힘 있는 교회 또는 목사가 가진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시대다. 적어도 종교계만큼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가 실현되는 영역이 되길 바란다. 음지에서 남몰래 신음하는 목회자 또는 교회가 너무나 많다.

2016-10-10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동성애 반대, 차별과 혐오는 더 반대해야

올랜도 동성애 클럽 총기난사 사건으로 성 소수자 이슈가 다시 논란이다.특히, 동성애 문제에 민감한 기독교계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 중 북가주 지역 한 침례교 목사의 설교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본지 6월15일자 A-2면> 그는 "동성애자들이 죽은 것은 사회를 위해 잘된 일"이라며 "나였다면 동성애자들을 벽에 세워놓고 총을 난사했을 것"이라고 했다. 종교는 신념의 영역이다. 동성애 이슈 역시 종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저마다 찬반 의견도 펼칠 수 있다. 그렇다고, 의견을 표출하는 태도나 행위에 반드시 종교성이 필요한 건 아니다. 상식과 예의 등을 지키는데 굳이 거창하게 종교심까지 필요한가. 매너는 고상한 게 아니다. 단지 성숙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이며, 상대를 향한 존중의 표현이다. 오늘날 도심에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게 흔한 일인가. 이번 사건은 영화도, 소설도 아닌 실제다. 가까운 지인이나 내 가족이 피해자였어도 그런 식으로 발언할 수 있을까. 종교를 통해 동성애를 반대하려면 미움의 근원을 두고 '죄'와 '사람'을 분간하려는 자세와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창조물로 여긴다. 창조물은 그 자체로 존귀한 가치다.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는 성경의 논리라면 인간 자체가 아닌, '죄'가 나쁜 거다. 기독교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애'를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차별, 멸시, 혐오, 무시하는 행위는 더욱 반대해야 한다. 동성애는 더 이상 비켜갈 수 있는 이슈가 아니다. 시대가 맞닥뜨린 현실적 사안이다. 단순히 기독교 테두리 안에서 반대만 외칠 시기는 한참 지났다. 좀 더 실제적인 방안, 대화 방법, 태도, 논리, 대안 등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시대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은 더욱 제한될 수 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종교적 신념과 인권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조류 속에서 사랑이 바탕 된 기독교 정신마저 사라지는가. 동성애를 두고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배척의 잣대로만 이용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헤아리겠다는 동기로도 사용해야 한다. 사회 일각에서도 동성애를 반대한다. 그러나 같은 입장이라도 종교인의 반대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2016-06-20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행동을 보면 종교가 보인다

최근 가주세금당국이(FTB)이 '면세법인 리스트(Exempt Organization List)'를 새롭게 업데이트했다. 리스트를 분석한 결과 등록된 한인 운영 법인 중 약 70%가 교회 또는 선교단체였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주 한인 중 기독교 신자 비율은 무려 71%였다. 각종 자료가 보여주듯 미주 한인사회는 기독교색이 아주 짙다. 한인사회에서 교회 이슈가 민감하고 예민한 이유다. 종교 문제는 우선적으로 신념이 작동한다. 객관보다는 주관이, 있는 그대로의 '팩트'보다는, 내 관점에 부합되는 것만 사실로 인식된다. 때론 종교성이 강한 토양은 신념과 이성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도가 지나치면 종교가 무섭게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내가 속한 영역(교회)과 종교 밖의 영역이 마치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한 체계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각한 착시 현상인 셈이다. 착각에 익숙해진 행동은 때론 공격성을 띤 채 타자에게 비상식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미 전역에는 어느덧 한인 이민교회가 4000여 개 이상 세워졌다. 수많은 교회 중 도대체 어떤 곳이 건강하고 좋은 교회일까. 석가탄신일을 맞아 지난주 커버스토리로 40년 넘게 수행의 길을 걸어온 지암스님(관음사)을 인터뷰했다. 그는 출가 할 때 잘 만나야 하는 3가지를 ▶스승 ▶도양(수도하는 장소)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는 종교생활을 할 때도 적용된다"며 "종교를 가진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보면 저 3가지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종교는 너무나 광활하다. 그렇기 때문에 표피적 성질인 행동만으로는 종교의 깊은 세계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다. 반면, 종교는 깨우침을 기반으로 좋은 행동 양식까지 담아낼 만큼 드넓다. 종교의 영역 안에서는 누구나 좋은 모습만 보인다. 실체를 보는 게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모습은 내부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밖에서 종교인의 행동을 보면 그 종교가 보이는 이유다.

2016-05-16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장애·비장애 보이지 않는 '선' 지워야

4월은 장애인의 달이다. 지난주 종교면 커버스토리로 한인교계의 장애인 사역 현실을 보도했다. 일부 교회 또는 단체를 제외하면 한인교계의 4월은 장애인과 무관한 듯싶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위한 부서를 운영중이다. 각 교회의 귀한 노력 때문에 최근 수년 사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넓어졌지만 아직도 계몽돼야 할 부분은 많다.교회 내에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따로 분리되어 있다. 모임, 성경공부 등이 별개로 운영된다. 취재 가운데 만났던 장애인 관련 사역자들은 대부분 "특별 행사를 제외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교회에서 다 같이 교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이런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배'다. 예배 때 장애인 출입을 금지하는 교회는 없다. 당연히 장애인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장애인 예배'를 따로 제공한다. 취지는 좋지만 이러한 부분이 정말 장애인을 위한 배려일까. 교회가 장애인에게 집중하기 위해 사역 부서를 두는 건 좋은 일이다. 그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신체적, 정신적 불편 등을 돕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효율성을 위해 소그룹을 별개로 구성할 수 있고,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 사역(일)은 효율성을 따질 수 있지만, 종교 의식인 예배는 효율을 따져야 할 문제는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예배를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셈이다. 예배의 효율성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누구를 위한 '효율'일까. 혹시 예배 때 비장애인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감추기 위해 포장된 명목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 속에 정작 소외되는 건 누구인가. 물론 장애인과 예배할 때 불편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와 달리 예수의 가르침을 본질로 여긴다. 예수는 차별과 편견을 부정했고, 섬김과 낮아짐을 불편이 아닌 기쁨으로 여겼다. 그 가르침을 좇는 교회는 내세에 속한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가 현세에서 구현되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그 가치는 아직 장애인에 대해서 만큼은 이론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선을 지우려면 '예배'부터 통합돼야 한다.

2016-04-25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재벌과 종교, 갑질 습성의 공통점

최근 '갑질 논란'에 사회가 공분한다. 미스터피자 등을 운영하는 정우현 MPK 회장의 경비원 폭행, 현대BNG스틸 정일선 사장의 '갑질 매뉴얼' 등이 수행기사의 폭로를 통해 알려지면서 일부 재벌의 비상식적 행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재벌들의 갑질 논란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 몽고간장 김만식 명예회장,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 프라임 베이커리 강수태 회장, 피죤 이윤재 회장,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M&M 최철원 대표, 한화 김승연 회장 등은 갑질 구설수로 여론의 물매를 맞은 바 있다. 이런 일이 왜 자꾸만 발생할까. 본인이 속해 있는 영역과 현실의 영역을 혼동한 탓이다. 그들이 속한 구조(기업)는 본래 한정된 영역이다. 본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은 기업이라는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런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본인의 힘이 외부에까지 통용될 거라는 착각이 든다. 구설수에 올랐던 재벌들이 내키는 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다. 사회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며, 모든 영역이 마치 본인의 힘 아래 놓여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인 셈이다. 반면, 영역 밖에 사람들은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도, 행패 따위를 받아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기업 구조 안에서 그들은 '회장님'일지 몰라도, 외부에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요즘 갑질 논란을 보면서 오늘날 일부 기독교의 극단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 모든 것이 당연히 기독교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처럼 여기는 태도 때문이다. 그런 예는 많다. 재난이나 자연재해 등을 너무나 쉽게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가 하면, 이슬람 또는 동성애 이슈에 대한 논쟁은 대화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다. 교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상식적인 일에는 무감각하면서, 사회의 어그러진 모습만 교회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건 전적으로 기독교 제국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폐해다. 그런 습성이 배면 기독교의 주장을 사회적 언어나 몸짓으로 지혜롭게 전달하려는 감각마저 잃게 된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각종 이슈에 대해 자체적인 기준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을 마치 '갑'으로 여겨 모든 영역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면 오산이다. 그런 관점으로 모든 이슈를 접근한다면 종교를 통해 군림하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은 성숙할수록 신중하고도 겸손해야 할 책임을 수반한다. 그게 안되면 현실을 착각하는 재벌의 행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2016-04-18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사례비 이슈, 변화의 계기 되길

지난 한 달간 목회자 사례비(월급) 실태를 연이어 보도했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수많은 독자가 의견을 전했다. 거센 반응이었다. 대부분 불투명한 교회 재정의 현실을 성토하는 목소리다. 한편으론 "오늘날 교회를 향한 불신이 이 정도였나"라는 안타까움까지 느껴졌다. 실제 교회 재정을 담당했던 분들의 구체적인 제보와 증언도 이어졌다. 그만큼 사례비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과 직결되는 이슈다. 사실 기자에게도 사례비 취재는 접근이 어려운 성역인데, 일반인에게는 오죽하겠는가. 물론 그 성토가 모든 목회자를 향한 건 아닐 테다. 교회 재정을 이용해 비상식적으로, 과하게 사례비를 받는 일부를 향한 규탄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올바른 복음의 추구뿐 아니라, 재정적 투명성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취재였다. 헌금은 '연보'다. 지갑만 연다고 끝이 아니다. 기독교인에게는 그 돈이 올바르게 쓰이는지 관심을 갖는 것도 의무다. 반면, 오늘날 자본주의 속에 존재하는 교회가 정작 '자본'에서 깨끗하지 못하면 종교의 역할과 책임이 무색해진다. 일부 유명 목사들은 이번 기사를 내심 불편해 했다. 왜 불편했을까. 교회는 영리를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다. 적어도 본인 사례비에 대해 당당해야 할 이유다. 떳떳하다면 굳이 비공개로 하거나, 많이 받는다고 숨길 이유가 없다. 투명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 교회가 합당한 사례금을 지급했다면 불편해 할 이유가 있는가. 반면, 적게 받는 게 자격지심이 돼선 안 된다. 동종업계에서 통용되는 연봉 범위가 있지만 교회 사정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목회의 가치와 의미는 '돈'으로 잴 수 없다. 목사가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생계를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 다만, 현실과 괴리가 있는 과한 사례비는 분명 문제 아닌가. 취재 가운데 힘들게 살면서 헌금을 내는 교인들의 삶을 접했다. 그들에게는 일부 고액 연봉의 목사가 강단에서 외치는 돈에 대한 관점과 태도, 청빈의 가치가 헛헛하게 들릴 듯하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소셜네트워크(SNS)를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가진 힘을 휘두르기는 쉽고, 글에 대한 무거운 책임은 간과될 수 있는 공간이 SNS 아닌가. 취재 계기가 됐던 유진소 목사의 월급 공개 논란도 목사들이 SNS에 사실이 아닌 내용을 퍼뜨린 게 발단이 됐다. 심지어 남가주 지역 한 유명 목사는 그런 글을 "하나님 음성으로 듣겠다"며 버젓이 올려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번 사례비 이슈가 여러 면에서 변화의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2016-03-14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피해자가 못한 용서, 도대체 누가?

성추행 혐의로 교단 재판에 회부됐던 전병욱 목사(홍대새교회)에 대한 징계가 지난 2일 발표됐다. 교단 내 공직 금지 2년 강도권 2개월 정지다. 문제가 불거진 후 7년 만이다. 하지만 교계 안팎에서 논란은 여전하다. 사실상 교단에서 활동하는 목회자가 아니라서 이번 징계는 실효성도 없고 목회를 하는데 큰 지장도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면죄부'를 준거나 다름없는 경징계다. 먼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이번 재판은 사법기관이 주도한 게 아니다. 당시 피해 여성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당국에 신고하지 못했다. 이번 재판은 기독교 내부에서 교단 차원으로 진행됐을 뿐이다. 교단 재판국은 전 목사에 대한 여러 혐의 중 단 1건만을 인정했지만 그들은 전문 수사기관이 아니다. 전 목사가 다른 혐의까지 벗었다고 해석한다면 무리가 있다. 이번 징계 내용은 실망스럽다. 현재 피해자들이 '용서'를 못하고 있는데 그 누가 용서를 언급할 수 있는가. 교단 지도부에는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용서할 자격이나 권위가 없다. 일각에서는 "부풀려진 부분이 있다" "성추행의 구체적 증거를 대라" "피해 여성들은 이단이었다" 등 반론을 제기한다. 그게 바로 성추행이라는 범죄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힘든 이유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성적 수치심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만약 피해자가 '내 딸' '내 손녀' '내 누나' '내 여동생'이라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부풀려진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 여성과 전 목사의 통화내용 피해자들의 진술서 등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된 각종 증거 자료만 살펴봐도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성추행'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논란의 본질은 단순히 징계 여부에 있지 않다. 징계 이전에 피해자에 대한 눈물의 사죄와 통회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평생 안고 살아갈 깊은 상처가 신의 은혜와 실질적인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게끔 참회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용서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과연 무엇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회복시키고 살리는 길이었을까. 판결문을 보니 피해 여성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건 철저히 생략되고 가해자를 위한 변명과 옹호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걱정하기보다는 한국 교계의 안위가 더 신경쓰이는 듯하다. 교계 곳곳에서는 이번 판결을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건 징계 수준 때문만이 아니다. 회개와 용서라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취한 뻔뻔함 때문이 아닐까.

2016-02-08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교계 문제, 누구의 책임?

최근 목회자들이 한인교계를 대상으로 '서울대학교 JCD연구소 최고위 과정'의 학생들을 모집했다. 취재 결과 연구소 명칭이나 주최 측이 내세운 특전(수료증 발급) 등은 학교 측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월21일자 A-3면> 기사 보도 후 논란이 커지자 주최 측은 '서울대학교' 명칭을 빼고 유료(500달러 이상)였던 등록비를 무료로 변경했다. 관련 목회자들이 실수를 인정한 뒤 재빨리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한인교계의 오래된 문제 중 하나다. 한때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라는 단체가 유명 목회자들의 이름을 이사 명단에 무단으로 포함시켜 논란이 됐었다. 당사자들은 본인도 모르는 직함을 수년 째 달고 있던 셈이다. '종교개혁 500주년 미주기념위원회'란 단체 역시 유사한 사례로 한인 교계에서 문제가 된 바 있다. 이런 식의 불법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 모든 피해가 고스란히 대중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선한 명분을 앞세워 종교심을 자극하면 사람 마음은 쉽게 열릴 수 있다. 그래서 무서운 게 종교 아닌가. 이때 대중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유명 목회자나 명성을 내세운 단체 이름 하나만 믿고 잘못된 신뢰를 갖는다. 이는 교계를 변질시키고, 공신력도 없는 단체에 힘이 실리는 원인이 된다. 특히 종교계 행사는 신뢰와 흥행을 필요로 한다. 이를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건 유명 인사를 간판으로 내세우거나, 공신력 있는 단체인양 행세하는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독자의 이목을 끌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 보도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독자는 언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기사에 실린 정보를 그대로 수용한다. 종교라는 성역과 언론 본연의 기능(비판.견제.감시)은 상충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본질을 잃고 기본적인 팩트 체크조차 생략한 보도는 수많은 폐해를 양산한다. 오늘날 교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는 분명 역할을 다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한인교계에서 횡행하는 이름 무단 사용에 대한 문제 역시 그렇다. 만약 이로 인해 피해가 발생한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목사인가, 언론인가, 교계 단체인가. 책임소재를 따지는 사이 모든 피해는 대중에게 돌아간다.

2016-02-01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산다는 건…

현세(現世)에서의 삶이 전부인가. 종교는 이 물음을 끊임없이 인간에게 던진다. 종교의 방점은 내세(來世)에 있다. 그래서인지 비유가 많다. 하늘이 본향인 기독교는 인생을 나그네의 삶으로 설명한다. 불교는 윤회로 실존 너머의 세계를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현세의 '끝'을 말한다. 불가항력의 죽음이 그것을 분명하게 알린다. 그래서 죽음은 힘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인간이 결국 제한적 실체임을 깨닫게 한다. 세상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은 죽음이라는 그릇에 절대로 담길 수 없다. 삶은 죽음으로의 귀결이다. 누구나 반드시 마주할 현실이다. 어느 정도 피해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도착하게 될 종착지다. 그 앞에서 누가 겸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종교가 유한한 인생에 던지는 영원에 대한 물음은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 궁극의 물음 앞에서 가진 것을 과신하거나 맹신할 수는 없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말이다. 혹은 외모든, 학벌이든, 인맥이든, 지식이든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질 연기일 뿐이다. 현세의 가치로 치장된 '나'는 본래의 모습을 망각하게 한다. 본질의 '나'는 덕지덕지 붙은 것을 떼버리고 남은 게 실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그 사실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존재다. 사실 인생에서 갑을(甲乙)은 의미가 없다. 거기에 가치를 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유한한 것을 얼만큼 소유했느냐에 따라 나뉘는 현세의 서열 따위가 생명이 담아내는 존귀한 의미 자체를 훼손하거나 하대한다면 그건 교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는 현세를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걸 경계한다. 끝(죽음)이 있다고 내키는 대로 살겠다면 그만큼 무의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자유를 가장한 삶의 방종이다. 오히려 내세에 대한 소망은 현세를 함부로 살 수 없게 만든다. 종교가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에게 내세를 향한 진지한 고찰을 묵직하게 종용하는 이유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영원은 오직 내세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사소한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자. 내가 남보다 더 가졌다면, 남 위에 서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자. 가진 게 없다고 해서 타인의 삶과 비교하며 좌절하지도 말자. 높디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건물의 높낮이는 의미가 없어진다. 좋은 일이 지나간다면, 나쁜 일 역시 곧 지나갈 테다. 미움도, 슬픔도 다 한 때다. 현세의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각계각층의 종교인에게 새해 소망을 물었다. 지난주 종교면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저마다 종교인들이 전한 한마디에는 내세에 대한 염원이 묻어났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것…그게 종교의 삶 아닌가.

2016-01-11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을미년의 끝자락입니다. 끝은 돌아봄의 의미를 묵직하게 전합니다. 한 해 동안 사용했던 취재수첩을 넘겨보았습니다. 글씨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보는데 지난 1년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시간보다 빠른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마침표를 찍는 글을 쓰려하니 시간의 의미가 더 가슴 깊이 와닿습니다. 오늘은 격의없이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자 합니다. 사실 제 마음 한편에는 늘 긴장과 부담이 자리합니다. 영적인 관념을 소유한 종교를 향해 펜을 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실존 너머 존재하는 신념의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는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팩트(fact)'의 정의나 기준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민사회는 종교와 밀접합니다. 미주 한인 10명 중 7명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퓨리서치센터)도 있습니다. 그런 토양은 자칫 신념의 렌즈를 통해 친기독교적 기사만 '팩트'로 아니면 '오보(誤報)'로 인식하게 합니다. 입맛에 맞으면 좋은 글로 읽혀지고 아니면 나쁜 글로 여겨집니다. 교계의 자랑거리가 담긴 기사에는 신에게 영광이라며 찬사를 보내지만 치부를 드러낸 글을 쓰면 순식간에 '기독교 좌파'나 '신천지(개신교가 이단으로 지칭하는 단체)'로 의심받으며 비난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늘날 사회에는 수많은 정보가 혼재합니다. 미디어의 발달과 소셜네트워크(SNS)의 보편화로 언론의 플랫폼은 다양화됐지만 반면 출처가 불분명하고 팩트 체크조차 되지 않은 뉴스 콘텐트도 난무합니다. 종교 관련 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계의 기관 신문인지 저널리즘이 살아있는 언론인지 애매한 곳도 많습니다. 그만큼 각종 미디어가 난립하는 홍수의 시대입니다. 그 가운데 정론(正論)의 가치를 따라 독자에게 믿고 마실만한 물(기사)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저에게 주어진 엄중한 의무입니다. 만약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면 피해는 결국 누가 입겠습니까. 바로 독자입니다. 솔직히 그러한 책임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론 욕설을 듣기도 하고 오해와 구설에 시달릴 때면 기자로서의 소신과 환경 사이에서 고민하며 내면의 갈등도 겪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압박감을 벗겨낼 수 있는 건 기자로서 갖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건 저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올 한해 종교면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 가치를 지면에 담는 과정에 있어 필력이 부족해 다소 서투른 부분이 있었다면 너그러운 이해와 양해를 구합니다. 대신 종교면 제작에 갖는 애정과 지면에 담긴 '진실' 만큼은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신문은 독자와 함께 소통하며 만드는 거라 생각합니다. 가치와 의미가 담길 수 있는 소식이라면 언제든지 펜과 취재수첩을 들고 달려가겠습니다. 그런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건 기쁨이며 보람입니다. 그 설렘을 품고 저도 내년을 준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2015-12-28

[독자와 함께 쓰는 칼럼] 크리스마스에 대한 단상

사실 우리는 예수가 어느 날 태어났는지 모른다. 성경이 그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로마 시대에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에 교회는 태양이 '신(神)'이 아니며, 예수만이 하나님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태양임을 증언한 게 '크리스마스(Christ-mas)'의 기원이다. 이 말은 즉,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는 로마에서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태양신에게 제사를 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태양신에게 제사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청교도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종교개혁 시기 때부터 미신적인 크리스마스를 '특별한 하루'로 보내지 않았다. 개신교는 특정일에 어떤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청교도들의 그런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반면, 크리스마스에 예수의 탄생 사실 자체를 기념하는 것을 굳이 비판할 필요는 없다.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일로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되, 예수의 성육신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성탄절이란 그날 예수가 탄생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가 성육신 하여 '대리속죄(代理贖罪)'의 죽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데 있다. 또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마스를 뜻깊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개신교는 성탄 절기를 통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탄의 의미를 전하는 기회가 되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세상에 참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불필요한 크리스마스 논쟁 늘 이맘때면 곳곳에서 언성이 높아진다.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종교적 갈등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그 논란이 더욱 심해졌다. 사회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불쾌하다며 '해피 할러데이'로 대체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해피 할러데이'가 종교색을 뺀 중립적 인사라는 주장이다. 반면 얼마 전에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발끈했다. 유명 커피 업체인 스타벅스가 연말을 맞아 출시한 특별 컵에 크리스마스 디자인이 빠졌다며 이 회사를 '반기독교적 기업'이라고 몰아세웠다. 최근 뉴욕 브루클린의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축하행사로 종교적 행위이므로 크리스마스를 학교에서 언급하지 말라"고 했던 한인 여교장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도대체 크리스마스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문제가 될까. 이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낳은 폐해다. 본래 크리스마스의 유래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그다지 관련이 없다. 사회는 크리스마스 때문에 기독교를 원색적으로 비난한다거나, 기독교는 그런 사회를 향해 "신앙이 위협받는다"고 분개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는 이미 상업적 요소와 뒤죽박죽 섞여 변질된지 오래다. 때론 기독교인조차 알게 모르게 그러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지 않나. 종교를 떠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왜곡된 크리스마스를 두고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논쟁에 힘을 쏟는다. 그런 갈등은 정작 따뜻해야 할 크리스마스를 냉랭하게 만든다. 이제 불필요한 싸움은 멈췄으면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장열 기자

2015-12-22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목회자에게 스트레스보다 더 힘든 건…

목사의 길은 쉽지 않다. 지난주 종교면에는 필립 와그너 목사(LA오아시스교회)의 글을 소개했다. '목회자의 비밀스러운 고통'이란 글에서 그는 어려운 기독교 상황에 대한 각종 통계를 근거로 목회자의 스트레스 6가지를 언급했다. 하지만, 와그너 목사가 언급한 스트레스가 전부일까. 아니다. 그건 일부에 불과하다. 현실은 훨씬 더 녹록하지 않다. 스트레스 말고도 감내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다. 우선 목사는 기독교의 가치(복음)로 세속의 가치와 마주해야 한다. 사실상 교계 생리가 사회의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요즘은 교회 숫자에 비해 목사가 많아서 일자리(교회)를 구하는 게 어렵다. 소수의 목사를 제외하면 낮은 사례비로 생계 유지도 힘들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역지를 찾기에는 벽도 많다. 교계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 정치적 요소, 인맥 등이 작용한다. 교회 개척마저도 자본과 엮이는 시대 아닌가. 교회는 이제 크기로 나뉜다. 이는 암묵 가운데 목회자의 그릇을 가늠하는 잣대가 됐다. 그런 인식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성공과 실패를 성경적으로 재정의하려면 배짱도 두둑해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 기독교는 외부(사회)로부터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가운데 기독교를 설파하겠다면 어설픈 실력으로는 안 된다. 울타리(교회) 너머 세상을 보려면 넓은 시야도 갖춰야 한다. 신학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머리와 가슴으로 수용하는 곳이다. 거기서 신념, 인성, 실력의 조화를 위해 목회자로서 기본을 충실하게 다져야 하는데, 현실은 학위를 '배경' 또는 스펙 정도로 여긴다. 각종 유혹과 변질의 위험도 늘 따른다. 누가 부와 명예, 권력이 싫겠는가. 하지만, 그걸 이루겠다면 차라리 다른 직종을 선택하는 게 낫다. '신(神)'에게 모든 걸 의탁하면 된다고 말하진 말자. 그건 겸손이 아닌, 신에 대한 기만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늘이 모든 걸 이끌지만, 그 과정에는 분명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 종교인을 꿈꾼다면 지금은 개인의 감정과 신의 부르심을 상당히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분별해야 하는 시대다. 착한 심성을 가졌다거나, 신앙의 열정이 충만하다고 그 길을 걷겠다면 오판이다. 물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목사가 받는 스트레스는 딱히 종교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목사가 신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다른 직종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목사뿐 아니라 '신' 앞에서 모든 신자는 각자의 직업이 '성직' 아닌가. 다만, 목사는 인간의 영혼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면 혼자가 아닌, 수많은 영혼이 함께 해를 입는다. 자신 없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스트레스 이상의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는게 목회자다.

2015-12-07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어렵지만 그래도 ‘축제’는 열려야…

한인 교계에서는 매년 발달장애인을 위한 행사인 '사랑의 축제'가 열립니다. 밀알선교단과 한인교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으는 연합 사역입니다. 지난주 종교면에는 사랑의 축제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지난 2000년 처음 시작된 이 행사는 그동안 남가주 지역 중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매년 순환 개최돼왔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지속해왔던 사랑의 축제는 지난 2011년 처음으로 중단됐습니다. 2013년에도 열리지 못했습니다.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한인교회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처럼 교회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그 해에 행사를 주관하는 교회가 비용을 전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가주 밀알선교단 단장을 역임했던 이영선 목사는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금년 행사도 9월까지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며 힘든 현실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취재기자로서 매년 사랑의 축제를 보도하다 보니 행사를 위해 수고하는 관련 단체, 자원봉사자, 한인교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됩니다. 사실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교회가 모두 지원한다는 건 부담이 큰 결정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교계 내 관심도 그리 높지 않은데다, 장애인 사역은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자주 밀려나는 것도 현실입니다. 게다가 사랑의 축제가 매년 이색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흥행'이 된다거나 이목을 끌기엔 많은 것이 뒷받침되지 못합니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사랑의 축제는 올해도 열리게 됐습니다. 이번 행사는 11월21일(오전 10시~오후 3시)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열립니다. 언뜻 보기엔 수백 명의 발달 장애인을 불러서 몇 시간 놀고 끝내는 단순한 이벤트 같지만, 행사가 열리기까지는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수많은 크리스천의 마음과 한인교회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건 행사를 중단할 수 없을 만큼 사랑의 축제를 손꼽아 기다리는 발달 장애인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사랑의 축제가 누군가에게는 이벤트성 일일 행사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1년에 한번 너무나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내년 행사가 벌써 걱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영선 목사는 웃음 표시와 함께 "밀알선교단의 부담은 여전합니다"라며 이메일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제는 그 부담을 독자들도 좋은 마음으로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교회 행사라고 꼭 기독교인만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발달장애인이나 가족들을 알고 있다면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도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모두가 함께할 때 '의미'는 더욱 가치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2015-11-09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언론이 대형교회를 주목한 이유

최근 LA지역 최대 한인교회인 나성영락교회가 일부 부교역자들의 '분리 개척'을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사실 분리개척은 너무나 의미 있고 좋은 일이다. 마땅히 축하 받아야 한다. 요즘 일부 대형교회에서는 교인끼리 얼굴을 모를 정도로 커져 버린 몸집을 줄이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으로 분리 개척을 지향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논란이 됐을까. 이번 결정은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보통 교계에서 '분리 개척'은 오랜 논의를 거쳐 신중히 진행된다. 단순히 재정 지원뿐 아니라 개척 방안 및 분리 절차, 개척 지역 선정 등 상당히 복잡한 이슈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질적 측면 외에 개척하는 교회가 잘 세워져서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교인들의 기도와 격려 등 총체적인 뒷받침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나성영락교회의 분리 개척은 여러모로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분리 개척은 갑자기 해임을 통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사자들이 상당히 당혹스러워 했던 이유다. 분리 개척에 대한 구체적 방안과 절차에 대한 언급도 처음엔 없었다. 오히려 확실했던 건 올해 말까지 사임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교회 측은 통보를 마친 후 그제야 분리개척위원회를 구성했다. 해임 통보부터 하고 두 달 남짓한 시간에 개척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건 상식적으로 순서가 맞지 않았다. 본지 취재 결과 이미 교회 내부에서는 기사가 보도되기 전부터 사임 대상자 명단이 돌기 시작했고, 사실상 구조 조정 성격의 감원 결정을 내렸다가 논란이 일자 뒤늦게 '분리 개척'을 고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기사 보도 후 나성영락교회 일부 교인들로부터 극심한 항의가 이어졌다. 그중에는 기사에 반론을 제기한다며 해임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하거나, 교회 내 각종 배경을 설명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의 목적은 교회의 시시콜콜한 내부 상황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안은 어떤 이유가 됐든 분명한 건 교회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명분과 과정에 모두 문제가 있었고, 신문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인사회에서 개신교 인구는 다수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LA지역 최대의 나성영락교회가 갖는 상징성이나 영향력은 분명 크다. 그동안 보여온 행보만 봐도 한인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친 커뮤니티 교회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는 대형교회가 더는 사적 영역이 아닌, 모두에게 보이는 공적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본을 보여야 할 책임과 의무 역시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비록 논란은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나성영락교회가 올바른 선택과 투명한 과정을 통해 분리 개척의 좋은 선례를 남겨주길 바란다.

2015-11-02

[독자와 함께 쓰는 칼럼] 교황의 ‘한 수’ 배워야

"약삭빠르고 체계적으로, 쇼맨십까지 갖춰서 그가 지구 대통령이 되려함을 보여주었다". 허핑턴포스트 하워드 파인만 편집인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쓴 글이다. 교황 스스로 그런 의사를 밝힌 적은 없어도 그가 미치는 영향력과 행보가 마치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미국을 방문했던 교황의 인기는 대단했다. 교황 제도가 가톨릭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실감났다. 가톨릭은 '교황 제도'라는 비성경적 시스템을 통해 지상에서 신적 대리자 역할과 그 형상을 원하는 대중을 사로잡았다. 부러울 정도로 성공적이다. 프란치스코처럼 직분에 걸맞게 잘 처신하면 목적하는 바가 백분 성취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황으로서 임무수행이 탁월했다. 프란치스코는 대중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다. 불편해도 작은 차를 타고, 화려한 만찬 대신 노숙자와 식사를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서 자본주의의 착취와 모순을 질타함으로 정의와 청빈, 자비의 사제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인품인지 아니면 고단수 쇼맨십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는 전자일 것이라 믿는다. 비록 쇼맨십이 어느 정도 작용했어도 그런 행위는 가치가 있으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작은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더 큰 영광과 존경을 유도할 줄 아는 영특함을 가진 사람이라야 그런 쇼맨십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교황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몸에 밴 청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거라 본다. 개신교의 유명 목사 중에는 그 정도 쇼맨십을 보일 센스조차 없는 이들이 많다. 비루하고 작은 것을 탐하다 더 큰 영광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돈을 밝히다가 명예와 영광을 땅에 떨어트리고 한국교회의 위상을 실추시켰다.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은 이 부분에서 교황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그래서 개신교를 더 이상 욕 되게 하지 말고 이미지 개선에 기여하길 바란다. 개신교도 ‘Swag’이 필요해 ‘Swag(스웨그)’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자신만의 멋, 개성, 여유, 세련된 스타일 등을 느낌 있게 표현하는 일종의 은어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미 기간 동안 보여준 행보에서 그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은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교황은 적어도 종교인으로서 ‘스웨그’가 있었습니다. 박영돈 교수의 말처럼 그 모습이 어느 정도 ‘쇼맨십’이라해도 그건 가치있는 행동입니다. 개신교는 은근히 배가 아팠나 봅니다. 가톨릭에 대한 교리 비판부터 교황이 보인 모습에 대해 진정성을 따지는 일까지 곳곳에서 잡음이 들립니다. 하지만, 종교적 담론보다는 요즘 개신교가 왜 사회로부터 지탄받는지 돌아보는 게 더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종교를 향해 고차원의 교리나 생각만큼 높은 기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쉬운 공감’을 원했습니다. 교황이 힌트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지금 시대에서는 종교가 기본을 지키고, 상식적으로만 행동해도 충분히 영향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톨릭 교황은 그 멋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개신교에도 ‘스웨그’ 넘치는 목회자가 많아지길 기대해봅니다. 장열 기자

2015-10-05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동성결혼 반대할 자격 없는 사람들

때론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기독교가 무섭다. 반대 주장을 표출하는 '태도' 때문이다. 최근 기독교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에는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회장의 발언("전통결혼을 지지하는 당신과 거래하지 않겠다")이 논란이 됐다. 이는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취재 결과 이는 한 언론사의 오보였다. 이 때문에 지난주 스타벅스 직원 오창호 씨의 글을 싣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해 동성애를 '죄'로 여기는 기독교인이다. 동성결혼도 반대한다. 다만, 동성결혼 이슈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무작정 퍼뜨리고, 기독교의 극단적 반응과 공격적인 행태 등을 자제하자는 의견을 글에 담았다. 역시 '동성결혼' 이슈는 민감했다. 글을 본 일부 기독교인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대개 주장은 이렇다. "설령 회장이 그런 말을 안 했어도 스타벅스는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반성경적 기업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스타벅스에서 일할 수 있나" "앞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 종교담당 기자로서 너무 안타까웠다. '반대를 해도 태도만큼은 바르게 하자'는 메시지는 무시하고, 무조건 반대만 했다. 보수 기독교 진영이 내부에서 제기된 자성의 목소리조차 수용할 수 없다면, 실제 대척점에 있는 동성애자 또는 동성결혼 지지자에 대한 태도가 어떨지 짐작된다. 세상의 중심은 절대 기독교가 아니다. 그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각해보자. 만약 타종교가 그들의 종교적 신념대로 사회를 움직이겠다면 기독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인들이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사회에 소고기 판매 금지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가 무조건 악법을 따라야 한다거나, 비성경적 이슈에 침묵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선거 투표, 시민 운동, 사회적 캠페인, 민주적 시위, 교육 세미나 등 다양한 채널을 적극 활용하면서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많다. 기독교가 내부적으로는 성경 적 신념을 공고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와 소통하겠다면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성숙한 행동도 뒷받침돼야 한다. 과연 예수라면 어찌했을까. 당시 사회가 '죄인'이라며 저주하고 손가락질하던 세리와 창기에게 예수가 욕설을 내뱉었는가. 십자가로 향하던 그가 억울하다고, 시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신의 힘을 공격적으로 이용했는가. 설령 시류가 기독교를 배척 또는 차별할지라도 기독교가 사회를 향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옳을까. '성경 적 신념'에 따라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면, 그 주장을 성숙하게 '성경 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게 안되면 동성결혼을 반대할 자격조차 없다.

2015-09-28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유명인 '흥행'만 좇으면 기독문화 미래 없다

최근 한인 교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CCM가수나 유명 찬양팀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명세 때문에 시선을 끌기 좋은 것 같습니다. 교계 언론들도 앞을 다퉈 행사 소식을 보도하고, 그들을 초청하는 단체나 교회들도 저마다 대대적으로 홍보활동을 펼쳤습니다. 과연 그 정도 '급'을 섭외하려면 비용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취재를 해보니 소위 교계 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A급'을 초청하려면 적어도 1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교회들이 거액의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들을 초청하려는 이유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지난주 종교 면에 한국 유명 CCM 가수들의 방문을 계기로 미주 한인교계 기독 음악인들의 현실을 보도했습니다.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같은 CCM 찬양을 불러도 유명세에 따라 대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대우를 받으려고 찬양을 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인지도에 따라 극심하게 차이 나는 '대우'가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정작 미주 한인 교계에서 활동하는 기독 음악인들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찬양을 할 수 있는 무대도, 불러주는 교회도 별로 없습니다. 취재 중 한인교회들의 근시안적 시각이 아쉬웠습니다. 물론 유명 CCM 가수나 찬양팀을 부르면 '반짝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될 겁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유명세에 의존해서 시선을 끌어야 할까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미주 한인교계가 스스로 기독 문화를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될 겁니다. 재능있는 기독 음악인의 양성과 배출도 어렵습니다. 여러 CCM 사역자들을 취재했습니다. 미주에도 실력이 뛰어난 기독 음악인들은 많습니다. 굳이 큰 돈을 들여서 유명인을 데려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미주에서 활동하는 찬양 사역자만으로 양질의 집회나 공연을 개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은 '찬양을 위한 찬양 집회'가 아닌, '흥행을 위한 집회'에만 치중하게 하는 폐해를 낳습니다.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도 필요합니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찬양 사역자들은 "사례비로 밥값이나 주유비라도 받으면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교계내 인식이 세속 문화를 누릴 땐 그에 따른 비용 지불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독 문화에 대한 합리적 대가 지급을 인색해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도 없이 교회가 기독 문화의 발전을 기대한다면 욕심 아니겠습니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유명인만 쫓다가 그 사이 미주 한인교계의 문화 생태계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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